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토야마 이치로 (문단 편집) === [[요시다 시게루]]와의 악연 ===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50111006850.jpg|width=500]] 1953년 11월 17일, [[요시다 시게루]](왼쪽)와의 만남. 공직 추방을 당하자 정계에 나설 수 없게 된 하토야마는 부랴부랴 그가 세운 자유당을 맡길 만한 인물을 찾아나섰는데,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친밀했던 [[요시다 시게루]]였다. 요시다 시게루가 자유당을 접수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첫 총리직에 오른 걸 보면, 하토야마는 권력 접수 직전에 뼈아픈 추방을 당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요시다에게 자유당을 넘겨주며 '''네 가지 약속[* 혹은 세 가지 약속. [[요시다 시게루]] 참고.]'''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관계는 친밀했었지만, 1951년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하토야마는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난 이후 1952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당에 복당했고 요시다에게 약속대로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이미 권력을 확고하게 틀어쥔 요시다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앙숙지간이 되어 버렸다. 이는 두 사람 간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당 내부의 파벌 갈등으로 이어져 요시다파와 하토야마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요시다 총리의 연이은 원맨 행보와 '바카야로 해산'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하토야마는 결국 1953년에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과 함께 탈당하여 '분당파 자유당(分党派自由党)'을 결성한다. 동년 4월에 실시된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만을 얻어 요시다파의 199석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받자 다시 자유당으로 복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 분열상태는 지속되었으며 1954년 4월에 터진 조선의옥(造船疑獄)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의 '지휘권 발동 사건'[* 검찰이 자유당 간사장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제삼자수뢰죄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이누카이 다케시(犬養健) [[일본 법무성|법무대신]]이 법안 처리중임을 이유로 검찰청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하여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한 사건. 민주주의에 기반한 기소독점권 규제라는 명목의 지휘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오남용된 것으로, 일본 민주주의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으로 요시다 내각이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고 여론도 염증을 내기 시작하자 하토야마는 다시 동년 11월 24일에 탈당하여 [[개진당]] 의원들과 함께 [[일본민주당(1954년)|일본민주당]]을 창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